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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960년대 미국과 러시아의 우주 경쟁이 치열하던 시절, 나사에서 위대한 활약을 펼친 명의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60년대, 흑인, 여성, 엘리트 집단. 개의 키워드들만 대충 봐도 느껴지듯, 영화는 사회적으로 만연한 차별과 그것을 극복하는 주인공들의 노력들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차별은 나빠요. 우리 모두 지구촌 가족, 평등하게 친구친구 보다는 단계 나아간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다. 무엇보다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차별의 모습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아주 동떨어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기에 더욱더 영화를 보고 뒤에도 여러 다시 곱씹게 되는 영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에 남았던 가지 장면을 통해 영화가 담아내는 차별의 실상,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차별과 극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 혹시나 위에서 언급한 영화에 대한 설명이 영화를 다소 무겁고 진지한 영화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영화는 담고 있는 메시지를 풀어내는 방식도 스토리도 매우 가볍고 경쾌하므로 그냥 문득 영화가 보고 싶을 가볍게 꺼내들어도 괜찮을 수작이다.

 

장면 #1 누군가에겐 사소한 고장도, 출근길도 쉽지 않을 있다.

영화의 도입부는 주인공이 출근길에 고장난 차를 고치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렇게 곤란을 겪고 있는 그들에게 경찰차가 다가오고, 그녀들에게는 시간에 도로에서 차가 고장나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있는 명분이 필요하다. 그것도 무엄(disrespectful)하지 않은 공손한 말투로 말이다. 출근길에 차가 퍼지기 위해서 요구되는 신분증 위에는 구구절절한 신분증명이 뒤따른다.

랭리에 있는 나사에서 일해요

나사라니 엄청나군요. 그들이 당신들을 고용했다구요?

거기서 우주 개발계획에 참여하고 있는 여성들 많아요.

짧은 대화 속에서도 주인공들은 백인 경찰이 이야기하는 당신들 목적지를 애써 흑인 아닌 여성으로 돌려야 한다. 보다 위협적인 차별을 받을 있는 쪽으로 말이다. 세상에나. 이후에도 러시아 놈들보다 우리가 먼저 우주에 사람을 보내야되지 않겠느냐, 우주비행사 그룹들 머큐리7 최고 아니냐 사소하고도 사상검증을 거친 뒤에야 그들은 누군가에게는 당연했을 권리를 누릴 있다. 훌륭히 사상검증을 거친 덕에 경찰관의 호의를 얻어 출근시간에 늦지 않도록 순찰자의 에스코트도 받을 있게 되었다. 속에서 그들이 있는 저항은 백인 경찰이 모는 차량의 꽁무니를 금방이라도 박을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쫓아가는 뿐이다. 단순한 출근길의 차량고장이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히 주어지는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자신의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면 곳에는 분명히 차별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있지 않을까.

 

#2  악의 없는 차별에 대하여.

영화에서 주인공 하나인 캐서린은 그녀의 뛰어난 해석 기하학 능력을 인정받아 흑인이 번도 발을 들이지 못했던 우주 업무 그룹에 전산원으로 투입되게 된다. 투입된 날부터 그녀에게 쏟아진 시선과 검토를 위한 서류에서 몇몇 숫자들을 지워서 전달하는 유치하고 사소한 차별들은 차치하더라도, 일단 우주 업무 그룹이 속한 건물에는 유색인종을 위한 화장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건물을 벗어나 주차장을 가로질러 그녀가 원래 머물던 유색인종 근무동에 위치한 화장실까지 달려야 한다. 쏟아지는 업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캐서린은 화장실로 뛰어갈 때에도 자신이 검토하고 해석해야할 서류들을 뭉치씩 들고 뛰어다닌다. 또한, 사무실 켠에 항상 준비되어 있는 커피도 캐서린에게는 쉽게 누릴 없는 권리이다. 커피포트 커피를 마신 다음날 커피포트 옆에는 흑인용(Colored) 커피포트가 놓여 있다. 물론 커피가 내려져 있지 않은 채로.

이런 차별이 해소되는 계기는 의외로 단순하다. 우주 업무 그룹의 본부장은 캐서린이 기대보다 뛰어난 성과를 보이자 캐서린을 신임하며 더욱 많은 일을 시키기 시작하지만, 캐서린이 너무 자주 자리를 비운다. 결국 폭발한 본부장은 캐서린의 잦은 자리비움을 질책한다.

화장실? 빌어먹을 화장실! 하루에 40분이나?! 거기서 하는데?

그제서야 캐서린은 그간 묵묵히 감내해오던 많은 차별들을 밖으로 쏟아낸다.

여기엔 제가 화장실이 없어요. 건물엔 흑인화장실이 없어요

800m거리라는 알고 계신가요? 먼거리를 보러 걸어가야 해요.

자전거도 없어요. 유니폼은 무릎 아래까지 오는 스커트에 힐도 신어야 하고요.

밤낮으로 개처럼 일해요! 그런데도 커피포트 손대는 전부 꺼려하구요!

( 빠루   한   방이면   오 - 케이 !)

이제 됐네. 흑인 화장실은 이제 없어, 백인 화장실도 마찬가지.

급할 어디든 . 사무실에서 가까운 쪽으로

집엘 안가고, 자꾸 사고 터질 때마다 직원들한테 니들은 수당없어! 외치는 것만 빼면 존멋짱멋 카리스마 넘치는 일에 미친 본부장님 덕분에 깔끔하게 차별은 사라지고, 캐서린은 사무실에서 가까운 화장실을 이용하고, 남들과 같은 커피포트를 이용하며 보다 생산성 높아진 본부장의 계산노예1로서의 본분을 다할 있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추가로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과연 차별은 본부장 명에 의해서만 해결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선생님이 친구를 괴롭히지 말라고 가해자를 처벌해도, 왕따시킬 놈들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며, 회사에 어떤 긍정적인 시스템을 도입해도 악용할 사람은 다들 악용한다는 것을. 캐서린이 자신이 겪고 있는 차별을 토로할 때의 나머지 백인 직원들의 표정을 살펴보자. 이건 불쾌감이라기보다는 당혹감 같지 않은가. (물론 성격 더러운 본부장의 실시간 그라데이션 빡침을 직관 중인 부하직원들의 조땜 실감 모먼트일 수도 있다.)

이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가 차별임을 몰랐을 수도 있다. 사회는 공동체 유지를 위한 시스템을 만들고, 내부 구성원들에게 시스템을 학습시켜 사회구성원으로 길러낸다. 이렇게 사회적 학습에 의해 만들어진 차별은 개인의 윤리적 결함 혹은 악의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으며 사회적 공감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악의를 가진 차별보다 지독하고 위험하다.  다시 말해, 문제를 삼더라도 남들 그러는데 너만 유난이야? 소리 듣기 십상이라는 게다. 아마도 본부장이 그랬듯 그들 대부분은 그들의 건물에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고, 흑인 전용 커피포트를 따로 준비한 것도 자신의 이유 모를 불쾌감을 피하기 위한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자라오며 흑인과 뭔가를 함께 하는 것은 불쾌한 것이라고 보고 익히다 보니, 어느새 이유 따위는 필요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불쾌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분제가 존재하던 조선시대에 노예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고 지금의 기준으로 시대의 양반들의 인간성과 윤리의식을 공격할 없는 것처럼, 우리네 아버지들이 가부장제의 화신으로서 악의를 가지고 아내에게 독박육아, 독박가사를 시켜온 것만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캐서린의 절규를 들으며, 그리고 본부장이 흑인 전용 화장실을 없애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해왔던 일들이 차별이었음을 깨닫고, 고치게 것은 아닐까. 어떤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차별로 인해 겪는 불편함의 원인을 궁금해할 있는 관심과, 사회적으로 용인되어 차별이 문제임을 인정할 있는 포용력 가지가 가장 필요한 것이다.

 

#3. 일단 넣어보시라니까요.

영화의 주인공들은 인종차별에 고통받으며,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그런 순수한 피해자는 아니다. 모두 대학 교육을 받았으며, 나사라는 그럴싸한 직장도, 자신의 가족과 함께 머물 있는 집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주말 예배에서는 목사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지역 사회에서 인정도 받고 있다.

소위 말하는 정도면 괜찮은사람들이다. 자신이 현재 가진 지위를 유지하며 산다면 어떤 의미에선 아무런 불편 없이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 차별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차별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이러한 차별 앞으로 내몰았을까? 바로 자리이다. 그들은 본인의 노력에 의해서든, 타이밍이 좋아서든 어찌되었건 기존에 흑인 여성이 들어갈 없었던 기득권의 영역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리에 가보지 않았다면 겪어보지 않았을 차별들을 마주하게 것이다. 이것은 자리에서 원래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으레 여성은 회의에 들어올 없었으며, 흑인은 정규직 관리자가 없었지만 업무적 필요성에 따라 이러한 항상 그래왔던 차별의 불합리성을 이야기하는 개인 앞에서 그들이 그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왔던 관행들이 차별이었음을 생각할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안에서 용기 있는 명에 의해서 이러한 차별들은 조금씩 해소되어 간다.

어느 집단에 속해있는 사람은 집단의 눈으로만 사회를 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자신의 관점으로 재단하고 평가하게 마련이다. 그런 경직된 집단 속에 충격을 주지 않고서는 속에 자연스러운 합리적인 숨어있는 차별과 악습을 발견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여성 임원 의무할당제와 같은 제도를 응원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단 넣어보시라니까요.

 

마치며,

앞서 언급한 나에게 인상깊었던 개의 장면 외에도 영화는 이야기 내내 곳곳에 자연스럽게 시대의 차별을 배치해 둔다. 여성직원들은 모두 치마에 하이힐을 신고 근무하며, 버스에서는 흑인들은 뒷자리에 타야하고, 건물에 모두 흑인용 출입구가 있고, 흑인들은 상대적으로 도서의 양도 질도 부족한 흑인 전용 도서관을 이용해야 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별들은 그대로 전시되지 않고 그저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차별에 일일이 조명을 비추지 않은채 그대로 그저 흘러간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영화적 배치가 감독의 의도는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많은 차별들이 그런 것처럼 차별들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게 사회적으로 인지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차별을 하는 쪽도, 당하는 쪽도 차별을 내재화하고 살아간다. 선만 넘지 않으면 불편함이 없는 구획지어진 평화다. 이러한 평화 속에서 차별을 재생산하고 공고히 하는 것은 기득권층만은 아니다. 캐서린과 데이트를 하는 흑인 대령은 캐서린이 하는 일에 대해 여성들에게 그런 일을 맡긴 대단하다고 이야기하고(덕분에 개털리지만), 엔지니어로서의 꿈을 키워가는 메리에게 남편은 흑인은 그런 없다고 주제 파악하라고 말한다. 아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하는 걱정이라지만 누구보다도 선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영화는 여성 명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내게는 이러한 만들어진 평화 속에서 차별을 끄집어낼 있었고, 이를 문제로 인식하고 개선하기 위해 사회적 시스템을 거스르고자 했던 모든 개인들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주변에 관심을 가지고, 타인의 불편에 이유를 궁금해하는 개인이 늘어날 사회의 차별은 조금 빨리 부각되고, 개선되어갈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성취를 위대한 흑인 혹은 약자그룹의 승리로 뭉뚱그리지 않고, 나사에 캐서린의 이름을 캐서린 존슨 전산동 지어졌다는 개인적 성취를 부각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결말부를 내가 좋아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종종 집단을 정의하는 여러 속성들에 매몰되어, 속에 있는 다양한 개인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 오늘도 사회적 시스템에 순응하기보다, 주변의 불편에 관심을 기울이고 불편의 이유를 생각할 아는 위대한 개인들의 승리가 이어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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