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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분이 좋냐고 물으면 '그냥 다요' 하고 씩 웃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몇 개의 장면, 몇 줄의 대사, 유려한 촬영 테크닉 등을 콕 집어낼 수 없는, 하지만 자연스레 마음에 들어앉는 그런 영화들 말이다. 나는 대게 그런 영화를 예쁜 영화라고 칭한다. <땐뽀걸즈>는 그런 영화다. 이유없이 그냥 참 많이 예쁜 영화.

빛나기 시작한 당신, 그냥 그걸로 좋다

나는 엔딩이 정해진 이야기를 좋아한다. 오픈엔딩으로 관객의 상상력을 강요하는 작품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하나로 매조지되는 것이 두려워 화룡점정을 관객에게 미룬 화자의 책임회피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딱 하나, 성장드라마는 예외다. 특히 청소년들의 성장드라마라면 더더욱. 이제 막 빛나기 시작한 그들의 지금을 하나의 결말로 갈무리하는 것이 너무도 아깝기 때문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뜨거운 연애가 지난 뒤 비춰진 쓰네오와 조제의 모습처럼, 한 철의 겨울을 보낸 뒤 한결 더 단단해진 김태리의 모습처럼(나는 아직 이 영화의 원작을 보지 못했다.) 힘들게만 느껴지던 주인공의 일상에서 조금의 빛을 찾는 여정을 함께하고 나면 이야기의 끝이야 뭐 어떠랴. 그대들 지금 그대로 마음껏 빛나도 좋다. 그 빛이 어디를 향하게 되든 그 자체로 아름다우리라 생각하고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 또한 그렇다. 영화 말미에 아마도 전국체전으로 보이는 체육대회 무대에서 '땐뽀' 공연을 펼치는 아이들을 스치듯 지나 거제시의 전경을 보여주며 마무리되는 장면은, 그들이 반짝였던 오늘의 경험이 그들의 팍팍한 삶의 공간 역시 조금은 빛나게 해주리라는 감독의 기대가 아니었을까.

해야만 하는 것들 속에 태어나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는 아이들

지현 부 : 조선소 갈 거야?
지현 : 나...조선소 가면...되겠지?
지현 부 : 니 알아서 해. 니 하고 싶은 거 해
지현 : 근데...
지현 부 : 조선소 갈 필요도 없고, 니 가고 싶으면 가고
지현 : 할 게 딱 정해져 있잖아
지현 부 : 인자 뭐, 열아홉, 열여덟, 열아홉, 뭐, 스물인데 뭐
지현 : 근데 언니 지금 삼성 다니잖아. 아빠는 왜 삼성 그만뒀어? 한 번 다른 거 해보고 싶어서?
지현 부 : 와? 안되나?
지현 : 물어보지도 못하나?
지현 부 : 아니...왜냐고 하는 것 같아서
지현 : 응?
지현 부 : 왜, 왜냐고 하는 것 같아서

-

선생님 : 9등급이 뭔가 하면 최고 꼴등입니다. 우리 학교에서 9등급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왜냐하면 3번만 쓰고, 2번만 쓰고 자는 애들이 많은데 그 아들 중에서 인자 뽑힌 아들이 9등급입니다.
은정 부 : 잠은 좀 잘 잘 깁니다. 잠은(웃음)

영화의 배경은 거제도 여자상업고등학교. 누군가의 동네에선 여섯시면 불이 완전히 꺼지고, 아이들은 졸업 후 조선소에 취업하는 것이 당연한 진로로 여기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가 미안하다. 운수업을 하는 아버지는 기존 직장을 그만둔 이유를 묻는 딸의 질문에서 지레 추궁을 느끼고, 횟집을 하는 아버지는 딸이 9등급을 받았다는 소식에 잠은 잘 잘 거라며 웃어넘긴다. 선생님은 자신이 춤을 가르치는 아이의 불행한 가정환경을 미리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미안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에게 어떤 방향을 강요하는 데에도, 아이의 결정을 믿고 존중하는 데에도 확신이 없다. 자신이 걸은 길은 행복하지 않아 보이고, 자신이 걷지 않은 길은 불안하다. 이러한 불안한 어른들의 곁에 사는 아이들 역시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미안함을 느끼는 그들에게 미안하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것을 요구하지 못한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그렇기에 모두가 참는 법,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다. 그렇게 걸어야 하는 길 위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춤이란 것은 어쩌면 유일하게 자신이 하고 싶어서 '선택'한 일탈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춤은 즐겁고 소중하다.

어른이 되는데 필요한 것이 꼭 나이만은 아니다

혜영 : 아, 선생님 싫어요. 아 쌤, 아 쌤, 안 살래요. 아...
선생님 : 싫어요 카면서 내린다? 웃긴다.
혜영 : 아, 뭐 먹지? 아..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아! 동생들 거 사야지.
선생님 : 니 것도 사라.
혜영 : 하하, 개이득!

이 영화에는 과거가 없다. 잘 다니던 삼성을 그만두고 운수업에 뛰어든 아버지, 딸을 거제에 홀로 두고 서울로 요리공부를 하러 떠나야 하는 아버지, 거제도에서 승진을 포기한 채 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 심지어 저마다의 불행을 떠안고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아이들까지. 영화는 그들의 과거를 전혀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저 보이는 것은 현재를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단면들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는 과거의 아픈 경험, 쓰린 교훈 등을 통해 성장하고, 아직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의 성장을 훌륭히 이끌어 내야만 하는 영웅적 어른이 없다. 그저 서로에게 미안해하면서, 고마워하면서, 조금씩 서로에게 기대어 조금씩 성장해나가고 있다. 별 일 없었냐고 물어보는 동료선생님에게 선생님은 '일이 매일 있다 아이가 우리는'하면서 웃어넘기고, 자신이 요리공부를 위해 서울에 가도 괜찮겠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딸은 담담하게 '그냥 잘 갔다오라고 할 수 밖에 없지.' 하며 어른스러운 모습 한 켠에 수학여행 때 용돈 보내달란 아이다운 투정을 살포시 보탠다. 많은 것이 낙후된 제한적인 환경 속에서 각자의 아픔을 안고 있는 아이들은 주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는 방법을 배우며 어른이 되어간다. 어른이 되는데 꼭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영화 내내 선생님에게 자연스레 반말을 하고, 선생님 역시 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모습이 불편하지 않게 이쁜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아이들이 연습하는 장면 위로 덮히는 김사월과 윤중의 노랫말이 예쁘다.

우리 여기서 이 길을 같이 걸었지
세상이 막막하기만 해도 지금은 그런 고민하지마
즐겁게 우리 춤을 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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