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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to다락

일상to다락#0619

다락귀신 2016. 6. 19. 15:28
#1
도도씨와 을밀대라는 강남역 평양냉면 집에 냉면을 먹으러 갔다. 처음엔 도도씨가 좋아하는 평양냉면을 먹으러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조금 더 나와 떨어져 살았던 그 사람의 시간을 엿본 느낌이랄까.
그런데 정작 식당에 도착해서는 내 앞에 앉은 도도씨보다 옆자리 테이블에서 나누는 이야기에 더 관심이 쏠렸다. 세네살? (물론 나는 아이의 나이를 잘 가늠하지 못하지만) 정도 되어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온 그 부부는 쉴새없이 아이의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남편분은 쉬지 않고 Phoenix를 더 배웠으면 한다고 이야기했고, 아내분은 전에 다니던 유치원은 Math도 Science도 가르치지 않았다며 이번에 옮긴 유치원에 대한 만족감을 표했다. 쉬지않고 신기할 정도로 과목명만을 영어로 표현하는 그 순도높은 한국어 대화 속에서 아이는 냉면과 함께 시킨 수육에만 관심이 있는 듯 했다.
암튼 이번에 옮긴 유치원은 외국의 어떤 시스템인가를 돈주고 사와서 적용하고 있는 곳으로, 이런 시스템을 갖춘 곳은 대치동밖에 없다는 만족어린 찬사 끝에 아내분은 조금 더 일찍 이 곳에 아이를 데려다놓지 못한 점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아이에게 다른 애들보다 느리다고 초조해하지 말라고, 빠른 것보다 바르게 배우는 게 중요하다고 당부했고, 나는 Phoenix와 Math와 Science를 배우는 네살아이가 된 것마냥 머리 속이 답답해졌다.
그런 머리답답한 이야기들을 전혀 답답하지 않은 표정으로 나누며 그들은 빈대떡까지 추가로 시켜가며 참 많이도 먹었다. 허기진 사람처럼 참 많이도. 그리고 아이는 여전히 수육에 만족해 있었다. 부모가 된다는건 생각보다 무섭고, 답답하고, 허기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어머니가 도도씨가 태어난 시간을 궁금해했다. 우리 어머니는 의명학이란 이름의 사주팔자 관련 학문을 공부하고 있고, 생년월일시에 따라 나오는 8자의 한자(이걸 팔자라고 한다고 하더라)에 의한 개인의 운명을 상당히 신뢰한다. 내가 진지하게 잘 만나고 있는 것 같아 이제 나에게 맞는 사람인지 궁금해지셨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알려드릴 생각이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건 정말이지 사이가 좋다고 생각하는 우리 모자관계의 몇 안되는 감정적 골이다.  자신이 공부한 바를 바탕으로 자식이 꽃길만 걷게 해주고픈 어머니와 자기가 직접 이뤄내지 못한 요행수는 죽어라고 싫어하는 아들 간의 갈등.
어머니가 좋은 남편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자식의 결혼에 민감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기에 모질게 대하진 못하면서도, 나는 그 운명학이라는 것이 정말이지 진저리쳐질 정도로 싫다.
Y를 만날 때 어머니께 생년월일시를 알려드린 적이 있었고, 어머니가 공부를 배우는 선생님께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러 간 적이 있었다. 그 선생님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다고 망설이면서(어차피 안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Y는 요괴인간이라고 했다. 아마도 회사에서 왕따같은 걸 당할 수도 있을 거라고, 성격도 안좋고, 시기도 많고, 온갖 안좋은 이야기를 근거로 절대로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주팔자라고 힘주어 이야기했다. 그 이후로 어머니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Y에 대한 모든 이야기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헤어졌단 이야기를 제외하곤. 정 결혼을 해야겠거든 본인은 그 결혼식에 오지 않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Y에 대해서.
그런데 정작 내가 운명학을 싫어하게 된 계기는 그 때의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의 내 모습이었다. 그 전까지도 우리는 종종 다퉜고, 내가 Y의 전부를 사랑한 건 아니었음에도, 그 이야기를 들은 후로 사소한 다툼에도 내 머리는 어김없이 '요괴인간' 운운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들을 떠올려내고 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헤어졌고, 운명 따위는 신경쓸 필요도 없는 남남이 되었고. 종종 어머니가 이야기하시는 너는 팔자상 대학원에 가야한다는 이야기 외에는 내 삶에 끼어들 틈이 없었던 운명학이 이번에 도도씨 덕분에 다시 스리슬쩍 고개를 들기 시작한거다.
형은 30년을 함께 살아온 가족이 불편한 것과, 몇 년을 만난 것도 아니고 함께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분명한 사람이 불편한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한다면 그 선택의 방향은 정해져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어차피 언젠가 거쳐야될 길이면 일찍 이야기하는게 낫지 않겠냐고.
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처음으로 부모에게 소개하는 자리가 온다면, 그 자리에서만큼은 그 어떤 선입견도 없이 사람만 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내 욕심이고, 그 운명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뒤 내가 도도씨 앞에서 그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자신이 없으니 나는 일단 보류.
여전히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태어난 날과 시가 누구를 만나고 헤어져야하는 이유가 된다든가, 어떤 진로를 결정해야하는 이유가 된다는 건 여러모로 영 맘에 안드는 일이다. 첫째로는, 내가 나름 열심히 살아서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이미 운명적으로 정해져있었던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너무나도(종종 다 때려치고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아서 그 잘난 운명의 힘을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로) 싫은게다.
둘째로는, '운명'이라는 두 글자가 속에 담긴 개선여지 없는 폭력성이 싫은거다. 만약에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싫어한다면, 그 싫은 모습을 찾고 고치기 위한 노력을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내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했다면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생각하고, 노력할 수 있을 게다.
그런데 운명이란 건, 타협도 개선도 허락하지 않는다. 단지 '그 날, 그 시간에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살아갈 팔자인 거다. 글로 쓰면서 다시 생각해봐도 역시나 영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다. 역시는 역시 역시니까 역시나 도도씨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최대한 비밀로 해보는 것으로 결정. 우리 가족이 도도씨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도, 싫어하게 되는 이유도 '도도씨'였으면 좋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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