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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in다락

생각in다락#0523

다락귀신 2017. 5. 23. 14:35

공부를 한다. 책을 읽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맥주를 마신다. 비는 시간을 꽤나 알차게 채워 은혜를 만난다. (좋아하는 사람의 실명을 눈치보지 않고 거론할 수 있는 공간이구나 여기는. 그래 가까운 곳에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는 비밀연애의 도피공간이 이렇게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요즘의 나는 이렇게 산다. 공부보다 책의 비중이 높고, 그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의 비중이 높은 요즘이고, 그게 고민이고, 해결책을 알면서도 해결하지 않고 그 삶을 방치하는 나는 더 고민이다. 그러면서도 책을 읽는다. 책을 읽는 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죄책감이 덜하다. 죄책감이 아예 없도록 공부를 먼저 하면 되지 않나 싶지만 책을 집어든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어떤 책을, 영화를, 음악을 마주하는 순간은 선택보단 운명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특히나 책. 그 서가를 가득 채운 책들 중 한 권을 고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인연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골라든 책 속에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혹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면 더더욱. 

박형서의 <핸드메이드 픽션>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그리고 온다 리쿠의 <브라더 선 시스터 문> 역시도 제목이 맘에 드는 데다 얇아서 금방 읽고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집어들었다. 그리곤 두 권의 책이 절묘하게 섞여서 내가 듣고 싶었던 혹은 하고 싶었던 한 개의 이야기를 만든다. 두 권의 책을 번갈아가면 읽고 읽으며 글을 끄적인다. 정리한다. 레갈패드 맨 뒷장이 어느새 가득 찼다.(첫 장은 역시나 영어단어들이다. 역시나 겉으로 드러나고 싶은 건 영어공부다.) 생각가지들을 쳐내고, 크게 이야기하고 싶은 줄기를 추려낸다.

생각보다 글은 빠르게 나온다. 간단하고 정리가 잘 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쓰다보니 자연스레 길어진다. 좋은 글이 아니지 않은가 생각한다. 두 권의 책을 빌어서 오늘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말'과 '왜'에 대한 이야기, 나아가 "왜인지 말해봐"에 대한 이야기다. 

-

"요새 인터뷰를 받는 일이 늘었는데. 진짜 있더라. '당신에게 영화란', '당신에게 감독이란' 하는 질문을 마치 비장의 무기처럼 , 그것도 꼭 제가 처음 생각해낸 것처럼 하는 사람이.

'에피소드'도 놀랍지만, '주제는 무엇입니까' 공격이나 '이 영화에 어떤 뜻을 담았습니까' 시리즈도 놀랍다. 처음부터 이십자로 요약시킬 작정으로 나타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하라는 말인가? 그런 건 영화를 보고 나서 알아서 발견하면 그만이지. 만든 본인에게 이십 자로 요약시키려는 건 상당히 뻔뻔한 짓이려니와, 그럴 거라면 애당초 영화를 볼 필요가 없지 않나."

이거 봐요. 당신이 아까부터 거기에 집작하는 건, 당신이 뭔가 말하고 싶은 '뜻'이 있기 때문이죠? 당신이 생각하는 '뜻'을 내 입에서 듣고 싶은 거죠?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올랐지만 적당히 얼버무렸던 기억이 있다. "

-

 - <브라더 선 시스터 문> 內 '젊은이의 양지' 中

사람들은 꽤 많은 경우에 주제를, 그리고 이유를 요구한다. 결국은 전체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이야기는 물론 자신의 이야기까지도. '이래서였다!' 라고 정의하고 싶은 거다. 그럼으로써 현재를 설명하고, 나아가 거기서 파생된 고민들까지도 싹 답을 해버리려는게다. 그럼으로써 오늘 집에 가는 길엔 그 이야기의 흔적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

"언어를 습득하면서 인간은 상상의 범위를 규제받는다. 언어란 약속이며, 시가 소통의 매체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약속은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옥죄어오는 그러한 약속으로 인해 독창성에 대한 욕망은 어쩔 수 없이 억압받기 마련이다. 이 한계를 인정한 뒤에야 비로소 표현의 영역이 확장될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문자의 발명으로 인해 자유로운 영혼들이 그 안에 갇혀 침식당할까봐 두려워했다. 생각이 말로, 말이 문자로 고착되는 과정에서 규제가 생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리함이 자유로움보다 매력적이기에 결국 문자는 발명되었고, 우리는 새파란 죄수복을 입은 채 언어의 감옥에 갇혔다."

"거기에는 쓰기를 발명한 토스의 일화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발명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타무즈 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문자가 이집트인들의 기억과 지혜를 증가시켜줄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타무즈는 토스에게 슬프게 대답하였다-문자는 기억을 강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기억의 열등한 대용품일 뿐이라고. 그러니 문자로 인해 인간의 기억과 지혜는 오히려 감소하고 말리라고.

진실로 그렇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노래는 기억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손끝으로 고착시킨 문자는 망각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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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서 <핸드메이드 픽션> 內 '신의 아이들' 中

사실 내가 퇴사를 결심한 계기는 그 날 출근길 버스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이고, 공부를 시작한 계기는 그냥 MBA에 대해서 듣던 술집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라든가. 모든 결정은 아주 사소하고 설명하기 힘든 것들의 결합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라고 물어버리면 그 때부터는 그런 막연한 것들이 사라지고 상대가 납득할 수 있는 명징한 이유가 필요해진다. 음 그게 왜인지를 설명하자면, 어 어디까지를 설명해야되려나. 그러니까 여기까지라고 해야되려나. 쯤을 고민하다보면 적당히 타협한 명징한 이유를 만들어내는 거다. 그렇게 이유가 말로, 언어로 정리되고 나면 어느새 나도 그 정리된 이유를 믿게 되는 거고, 설명하기 애매한 '사소하고 막연한 것'들은 아마도 생명력이 다해버리는 게다. 그렇게 나는, 내 삶은, 내 고민들은 너무나 사소하고 정돈된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고작 이걸로 그렇게 힘들어하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 '왜'는 그리도 어렵고, '그냥' 따위로 적당히 넘겨버리고 싶은 곤란한 질문이 되는 것이 아닐까.

-

"내가 생각해도 어지간히 질질 끈다 싶다.

계속 우회만 하는 이야기를 불편하게 생각하면서도 여태껏 목적지로 향하지 못하고 빙빙 돌고 있는 나 자신이 참 어이없다. 이제 와서 뭘 그러느냐고 스스로를 놀려본다.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세상에 이미 다 알려져 있는데 새삼 주저할 게 뭐 있느냐고. 

하지만 그래도 최면에 걸려서도 고백하기를 망설이며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환자처럼. 나도 될 수 있으면 그 부분을 건드리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느냐고. 현재의 결과만 보면 되지 않느냐고 버텨도 본다. "

"긴 글을 읽어주어 감사하다. 이것이 나의 사 년이다.

사 년간의 핵.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저 그것만을 위해 사치스럽고도 아까운 사 년이라는 시간을 썼다는 것. 그저 그 이야기를 하는 데 이렇게도 꼬불꼬불 번거롭게 우회하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사과할게요."

"영화에 그가 알몸뚱이로 커다란 대문인지 교회 문인지를 여는 장면이 있다. 양쪽으로 열리는 문 저편에서 처음에는 한 줄기 빛이 비치더니, 점점 눈부신 빛이 흘러와 그의 몸 윤곽이 빛 속에 녹아든다.

그 장면이 어찌나 무서웠는지

무방비하게, 맨몸으로. 밝은 빛을 향해, 자신을 숨김없이 송두리째 드러내고 걸어가다니, 어쩌면 저렇게 무서운 일이 다 있을까. 나 같으면 무서워서 견딜 수 없을 텐데 싶었다. 

-

- 온다 리쿠 <브라더 선 시스터 문> 內 '그애와 나' 中

위로 혹은 조언이라고 건네는 다양한 이유들이, 그리고 이를 위해서 묻는 '왜'가 오히려 상대를 초라하게, 부끄럽게, 그리고 무서워서 견딜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 대상이 나이든, 남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상대에게(혹은 나에게도) 뭔가를 해주고 싶다면, 해줄 수 있는 이야기만을 듣고, 넘겨짚지 말고, 정의하려 하지 말고 그냥 같이 걸어가면 되는 것 아닐까. 왜인지 상관없이. 그냥 그러고 싶었다거나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어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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