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상to다락

일상to다락#1024

다락귀신 2016. 10. 29. 16:02

처음으로 혼자 가는 여행
계획을 세우기를 포기했고. 숙소도 안정했다.
그냥 발이 멈추는데서 먹고 자고 구경해야지.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면 거기서
한동안 멈춰서서 책도 읽고, 글도 쓸거야.
일상과의 접점인 휴대폰. 인터넷을 멈추기로 했다.
인터넷을 멈추자 어디도 가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두려움이 밀려왔다.
낯섦이 주는 두려움. 그리고 그만큼의 흥분
.
역시나 모든 문제는 겪기 전에 생각한 것보다 크지 않다고 생각해.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관광안내센터가 눈에 띄었고 서너개의 지도를 챙겼고, 터미널 안 카페에 들어가서 지도를 뒤적이며 가고 싶은 길을 찾았고 어렵지 않게 첫 목적지를 정했다. 아무 계획 없이 발닿는대로 혼자 여행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첫 목적지론 한려수도 케이블카를 선택했다.
뭔가 자연경관으로 힐링받고 싶었고.
늦으면 못탈 것 같았거든.
내가 제일 못하는 걸 요구한다.
정류장에 맞춰서 버스 내리기라니. 어릴 때부터 나는 졸다가, 딴 생각을 하다가 등의 이유로 내가 내려야될 정류장을 지나치게 마련이었는걸.
다행히도 나와 같은 목적지를 가진 노부부가 있다. 이어폰을 귀에서 빼지않고 그들을 믿어보기로 한다. 그들은 앞뒤로 앉은채 남편(아마도)분은 연신 창밖을 가리키며 아내(역시 아마도)분에게 뭔가를 이야기한다.
버스에는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 탄다. 평일 오후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문득 기분좋은 자유로움을 만난다.
월요일 오후 시내버스
당신들의 일상. 나의 일탈.


.
평일에 하는 여행의 장점 하나 더.
케이블카엔 사람이 적었고,
덕분에 일행들끼리만 태우는 친절을 베풀었고
바퀴가 우르릉 하고 아마도 떨어지면 반드시 죽을 높이로 케이블카를 밀어내고 나서야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음을 깨달았고, 한 쪽 구석에 앉은 나 때문에 케이블카가 한 쪽으로 기울어지진 않을까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으면서도. 그 와중에 사진은 찍어보겠노라고 상체만 돌려대며 사진은 엄청 찍었다.
관광지라 그런지 관광객이 생각보다 많아서 나만의 특권을 조금 빼앗긴 기분이 들었지만 바다와 섬, 초록과 푸름의 조합은 역시나 환상적이었고.


이제는 다시 떨어지면 반드시 죽을 높이로 나를 밀어낼 케이블카를 타고 돌아가야할 시간. 갈 곳은 두 군데밖에 안정했는데도 하루짜리 여행은 이래저래 바쁘다.
.
분명히 올라올 때 개찰구에서 내려올 때도 사용해야되니 티켓을 잘 챙기시라고 당부했으나. 역시나 나답게 잃어버렸고. '해치웠나?!' 따위의 멍청한 질문이 늘 악당보스를 죽지 못하게 만들듯이 '잃어버리지 마세요'라는 결코 당부가 티켓에게 잃어버려질 당위성을 부여한 것일지도 몰라. 아 잠깐만 케이블카는 내려가는게 훨씬 무서워.
혹시 잃어버렸으면 내려가는 표를 따로 사야되냐고 물어보자 직원이 '잃어버리셨어요? 이거일지도 몰라요.' 하고 꺼내준 티켓 한 장이 '역시 문제는 항상 생각보다 작다니까' 정도의 긍정과 '나밖에 잃어버린 사람이 없었나' 싶은 자괴를 동시에 일으켰다. 마치 이럴 때 도도씨가 같이 있었으면 다 챙겨줬겠지 같은 마음과 이런 말 꺼내면 역시나 구박하겠지 같은 마음의 공존 같은 거.
떨어지면 반드시 죽을 높이가 끝나간다.
.
​동피랑 벽화마을
엄청나게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 공간은 아니었어. 그래도 여행과는 가장 잘 어울리는 공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 안에서 동생의 머리를 묶어주던 어린 여자아이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던 것부터일까. 여행이란 건 단지 공간의 이동만으로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보게 만든다. 내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었던 일인데 그 땐 보지 못했거나, 보고도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았다면 여행을 떠난 공간에서는 사소한 것들도 모두 관심있게 지켜보게 되거든.
이 벽화마을이 딱 그랬다. 아무 의미 없는 벽에 그림 몇 개가 더해졌다고 벽이 벽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공간. 그림의 퀄리티는 훌륭했고, 그 중 베스트는 이것


아무 것도 없는 폐허일 뿐인데, 주변과 어우러진 그림 하나로 마치 어딘가로 가는 길인 것 같은 낯섬을 준다. 지나고 보니 재밌는 공간이었던 것 같다. 일상과 예술의 상당히 부적절한 공존이 주는 재미랄까?


예를 들면, 이 그림 옆에 앉아있던 아주머니들은 신명나게 고스돕(화투, 고스톱보다 이게 제일 어감이 좋아) 치고 있었다든가.


저 소행성 b612에선 어린왕자도, 장미도 없었고, 어린왕자'였으리라고' 생각되는 중늙은 아저씨도 없이 빨간 어시장조끼?를 입은 뽀글머리 아주머니가 손님을 맞았다든가?
내려오는 길에 새로 벽화를 그리는 사람들을 보았고(아마도 고등학교 선생님과 학생들로 보이는), 자기 집 앞에 벽화를 그리지 말라고 언성을 높이는 아저씨와 자기도 시켜서 하는 거고 기간이 정해져있어 빨리 완성해야하니 저한테 이야기 하지 말고 위원장님 혹은 시청에 가서 이야기하라는 젊은 남자 사이의 옥신각신도 봤다. 아마도 이 일상과 예술의 부적절한 공존은 앞으로도 계속 될 거고, 꾸준히 여기는 재밌는 동네일 것 같다.


아,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끼리도 맘이 맞으면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꽤 있는 듯 하다. 다음엔 나만 오롯이 생각하기 위한 여행 말고 낯선 사람을 만나기 위한 여행도 한 번 시도해봐야겠다고 생각해.
.
벽화마을에서 내려와서 가방이 너무 무거웠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에 눈앞에 있는 모텔에 들어가서 방을 잡았다.
혼자라니까 5만원인데 4만원으로 깎아주겠다 그러셨는데 이게 홀로여행의 메리트인지 원래 둘이 오든 셋이 오든 깎아주실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혼자 왔으니 비싸다 싶으면 냉큼 다른데로 가버릴 수도 있겠다 생각해서는 아니었을까.


방은 7층이고 뷰가 썩 괜찮다. 만족.
사장님께 근처에 괜찮은 저녁먹을만한 곳을 추천해달랬더니 옆집이 매운탕을 잘한단다. 딱히 매운탕이 끌리진 않으니 시장을 돌아다녀봐야겠다.
.
시장을 돌아다녀봤는데 놀랍게도 6시밖에 안됐는데 문을 닫은 곳도 많고 어둑어둑하다. 횟집골목만 밝은데 혼자 횟집을 들어가진 못하겠고. 결국 돌고돌아 사장님이 추천해준 볼락매운탕을 먹었다. 막 맛있거나 하진 않았어.
밤산책을 하겠노라고 맥주 한 캔을 사들고 걷기 시작한 통영 바닷가는 7시가 갓 넘은 시간에도 이미 충분히 어두웠다. 6시반에 식사가 안된다는 충무김밥집도 있었는걸. 문득 서울이 너무 오래 깨어있는 것일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6시면 충분히 하루를 끝낼만한 시간일지도 모르지. 나와 달리. 서울과 달리.

'일상to다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활in로테르담 0115  (0) 2019.01.15
일상to다락#0221  (0) 2017.02.21
일상to다락#1020  (0) 2016.10.29
일상to다락#0905  (0) 2016.09.06
일상to다락#0823  (0) 2016.08.23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