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다락방 문화칸

다락방 문화칸#0819

다락귀신 2016. 8. 19. 23:15
#1
영화를 보다보면
어떤 영화는 장면이 남고,
어떤 영화는 대사가 남고,
어떤 영화는 생각이 남는다.

최근에 봤던 영화 중에 <터널>은 장면보단 생각으로 남는 영화였다(물론 하정우는 생수랑 개사료마저도 맛있어보이게 만들 수 있는 먹방 마스터였다는 점은 예외).
이 영화는 내가 지금껏 봤던 이야기 중에 가장 세련되고, 잘 담아낸 세월호 이야기였다. 감독이 이를 의도해든 하지 않았든 말이다. 이 영화는 정말 단순하고, 익숙하고, 진부하게 답답하다. 주인공은 우연하게 터널에 갇히고, 그 터널은 당연하게도 부실공사였으며, 사람들은 이에 분노한다. 살려야한다는 여론이 생기고, 언론은 '단독'보도를 찾아나서고, 정치인들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실로 인간미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정의감 넘치는 소방관이 등장하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주인공을 구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역시나 당연하게도. 정말이지 진부하기 그지없는 설정과 이야기다.  우연한 사건, 그리고 피해자의 발생. 고민이 1도 필요없을 정도로 명확한 선과 악의 역할 구분. 재난영화의 교과서가 있다면 딱 이런 설정일 거다.
아마도 이게 다였다면 이렇게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을테지. 내 머리 속에 남은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람들'이었다. a 혹은 b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힘들 정도로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엔딩크레딧에서도 '식당 남성1' 정도로 남을 사건을 둘러싼 그냥 '사람들'. 이들은 주인공을 구해야한다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불타올랐고, 너무나 현실적이게도 이내 지쳐버렸다. 슬프게도 지쳤다기보단 질려버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적적인 생환을 기대하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구호물품 박스는 뒹굴었고, (죽었을지도 모를) 사람을 구하기 위해 멈춰져있는 터널 공사의 경제적 손실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구조작업을 멈춰야 한다고 '객관적으로' 이야기했다.
마침 구조작업을 하던 구조대 중 한 명이 작업과정 중 사고로 목숨을 잃고, 그 구조대원의 어머니는 구조현장으로 찾아와 주인공의 아내에게 '니 남편 시체 하나 구해오자고 내 자식이 죽었다.'며 계란을 던진다.
어느 4월의 이야기와 참으로 유사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현실에선 짧게는 두어달, 길게는 현재까지 서서히 진행되어 온 일들이 영화 속에선 두 시간만에 일어났다는 것. 시간의 압축에서 오는 감정선의 연결은, 유사한 이야기를 다르게 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영화 속에선 피해자 가족의 아픔도, 대중들의 질림도, 구조과정에서 가족을 잃은 또 다른 피해자의 아픔도 모두가 진행 중이다. '이 정도면 되지 않았냐. 이제 그만하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모든 감정이 다가와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감정이 다가오는 순간 '객관적으로'라는 단어의 폭력성이 드러난다. '이미 객관적으로 살아있을 수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객관적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멋대로 객관성을 들이미는 것도, 당신들의 집착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히고 있는지 아느냐고 사뭇 거국적인 충고를 건네는 것도 모두 작년부터 올해에 걸쳐 '악의는 없는 평범한 '식당남자1' 정도에 의해 자신이 가해자임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계속되어 온 폭력이었다.
이런 생각이 계속 남는 건, 저 너무도 지쳐있는 삶을 사느라 타인의 아픔에도 빨리 지쳐버리고, 유족들의 아픔은 이해하지만, 현실을 바라보라고 충고를 건네고, 구조작업을 중지하고 터널공사를 재개하는데 찬성하는 65%의 사람들 속에서 나의 모습을 찾는게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라고 다르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으면 그냥 입을 닫으면 된다는 그 간단한 사실 하나 지키지도 못하면서 섣불리 '당신의 아픔은 이해하지만'이라고 내뱉고 마는 사람들. 어떤 문제든 충고, 혹은 답을 제시해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에 빠져 사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정답이 아니면 거품을 물고 마는, 그러면서도 놀랍게도 빠르게 관심을 잃어버리는 그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나를 분리해내기 어려워지는 부분 쯤에서 이 영화는 나에게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답변보다는, 체온이 전해지는 손길 한 번, 포옹 한 번, 웃음 한 번 정도가 세상에 더 도움이 되는 법이다. 섵불리 당신을 이해한다며, 조언을 건네는 사람들, 그리고 나에게 하정우의 마지막  대사를 건네는 걸로 영화에 대한 생각을 마무리해볼까 한다.
"다 꺼져. 이 개새끼들아"

'다락방 문화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차 리브레 완결  (0) 2019.02.25
다락방 문화칸#0218  (0) 2017.02.18
다락방 문화칸 #0208  (0) 2017.02.09
다락방 문화칸#1227  (0) 2016.12.28
다락방문화칸#0830  (0) 2016.08.30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